『논어』는 총 20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정한 주제를 향하여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기보다는 공자와 그 제자들 등의 사람들의 말을 모아 놓은 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제가 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오히려 텍스트를 읽는 이에게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진다고 할 수 있고, 자신만의 생각을 펴 나가기도 좋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제를 향하여 나름의 짜임새를 생각하여 글을 쓰는 것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만은 않다는 예도 되겠습니다. 현행본 『노자』 2장에서 말하듯이, 천하가 A를 a라고 여기더라도, 그것이 정말로 a인지는 별개의 문제이지요.
그런『논어』의 마지막 편은 요왈편입니다. 세 개의 장이 있는데, 첫 번째 장은 길면서, 그 안에 공자의 말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공자의 제자들의 말도 나오지 않고, 내용은 공자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과거의 군주들, 요, 순, 탕, 무왕의 발언을 싣고 있습니다.『논어』라는 책에 어울리지 않다고 볼 수도 있고, 공자가 과거의 몇몇 군주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고, 그들의 말과 행동에 당대의 사회 문제를 해결할 길(도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가 있다고 보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논어에 포함될 만한 이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논어집주』(주자학의 입장에서 논어를 주석한 책입니다. 주자학의 기본 개념을 전제하고, 그러한 '생각의 틀' 위에서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와 삼경(시경, 서경, 주역) 또는 오경(앞의 삼경과 예기, 춘추) 등을 함께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주석한 책입니다. 자구의 정확한 해석보다는, 글을 통하여 어떻게 깊이 있는 생각에 도달할 것인가에 치중하는데, 이러한 점은 청나라 고증학이나 우리 나라의 실학자들에 의해 비판받기도 합니다.) 에서는 매우 깊이 있는 뜻이 담겨 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서론이 길어집니다만, 요왈편 첫 장(요왈편 첫 장이 "요임금께서 말씀하셨다"(堯曰)로 시작하기에 요왈편입니다)을 보면 "진실로 올바름을 꼭 지켜야만 한다."(允執其中)"라는 요임금의 말이 나옵니다.(여기서 올바름은 의역이며, 제가 가지고 있는 김학주의 논어의 번역을 가져온 것입니다.)몇 마디 더 있는데, 그리고 그 말을 순임금도 우임금에게 물려 주었다고 하는군요.
한편, 『서경(상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유가의 경전인 삼경, 또는 오경 중의 한 책인데, 요임금부터 서주 시대까지의 역사적 인물들의 말들을 담은 책입니다. 물론 그렇게 간주된 것이지, 그것이 실제로 과거의 인물이 한 말일 가능성이 낮은 말이 꽤 많습니다. 대체로 서주 시대에 가까울수록 실제의 발언에 가깝고, 그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말일수록 후대에서 손을 대거나 부분적으로 지어냈을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고 합니다.
이 서경에는 분서갱유로 사라졌다가 한나라 때 다시 복구한『금문상서』와, 그 뒤에 과거의 서경이 출토되어서 그 책을 토대로 펴낸『고문상서』가 있습니다. 그런데『고문상서』는 어느새 다시 사라져 버렸고, 그 뒤에『고문상서』를 복원했다고 주장하는 책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일찍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의심이 많았고, 성리학의 주희 또한 위작인 부분이 많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위고문상서』라고도 부릅니다.
어쨌든, 그러한『고문상서』의 대우모 편에는 위에서 이야기한 "순임금이 다시 우임금에게 물려 주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세 마디가 더 붙어서, 이렇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매우 위태롭고, 도를 지키는 마음은 매우 미세한 것이니, 정밀하고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중을 잡게 된다"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위의 번역은 김학주의『중용』책에 포함되어 있는 다른 글(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주희의『중용장구서』(『중용장구』의 서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과거에 16자 심법이라고 부른 적도 있는 듯 합니다.(그 출처는 저는 아직 잘 모릅니다.) 또한 이를 주희는 먼 고대로부터 성군들을 통하여 전해 내려온 진리라고 말하면서, 춘추전국시대에 그 가치로움이 잊혀질 뻔 하다가 중용의 저자(주희의 말에 의하면 공자의 손자 자사)가 그 뜻을 이어받아『중용』을 썼다고 말했습니다.(주희가『중용』을 주석한 『중용장구』라는 책의 서문에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근거로 주희 자신의 심성론을 전개했고, 그 뒤에는 율곡 이이도 이 말을 근거로 자신의 심성론을 전개합니다.
여기서 중(中)에 대하여 조금 부연할까요.『중용』에서 말하는 중(中)이라는 것은 단순히 가운데의 의미가 아니라, 변하지 않고 지켜야 할 바를 주어진 상황에 맞게 실천해 나가는 것을 의미하며, 신기하고 뭔가 있어 보여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방법보다는, 일상적이고 당연하면서 사소해 보이지만, 묵묵히 그리고 한결같이 지켜 나가는 것을 통하여 정말로 무언가를 해 낼 수 있는 방법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한결같음"은 하늘과 자연이 지닌 것이기에, 그것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자연과 하늘에 대비되어 작게 느껴지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하늘과 나란히 서는 인간이라는 존재로 나아가게 된다는 이야기가『중용』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도심(道心)이라는 것은, 유가의 관점에서는 대략 사람이 따라야 할 도리를 따르는 마음, 사욕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 인의예지를 지키고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등입니다. 물론 당연히 한대의 유학에서부터 청대의 유학, 삼국시대의 유학에서부터 조선 후기의 유학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테두리 내에서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졌고, 현대에서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유학의 관점 바깥으로 비껴서서 해석해 볼 수도 있겠고요.)
유정유일(惟精惟一)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여기서는 깊이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일단은 '한결같음', '청아하고 맑음' 등과 엮어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더욱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요.
하여튼, 이 짤막한 16자에 유가의 생각(특히 주자학 또는 성리학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바르게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는 점. 중(中)이라는 글자를 통하여 '한결같음', 신기하고 기이한 것을 떠나 인간이 이해할 수 있고 일상적인 것을 중시함', '한결같음을 통하여 하늘과 사람이 나란히 서는 것을 추구함' 등의 생각을 펼쳐 내었다는 점 등등.
또한 제가 "한결같음", "청아함", "맑음", "깨끗함" 등의 말들을 좋아하기 때문인지, 마음에 드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위에서 살짝 암시했듯이, 이 말의 진위는 좀 문제가 됩니다. 우선 이 말이 있는 편부터가『금문상서』에는 없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고문상서』를 통해 전해진 말이면서, 마지막 네 글자와 비슷한 구절이『논어』에, 처음 여덟 글자와 비슷한 구절이 『순자』에 나옵니다. 그런 점을 들어 청대 고증학자들은 이 구절이 앞서 있던 책들의 좋은 말들에서 짜깁기해서 만들어낸 말으로 보면서 큰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본 경우가 많았고, 다산 정약용의 경우에도『논어』와『순자』를 보고 만들어낸 말이지만, 구절 자체의 의미는 새겨 볼 만하다고 이야기했었습니다.
또한 람세스 2세 때의 카데슈 전투의 경우에서 생각해 보듯이 전해지는 과거가 실제 과거를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고,『죽서기년』, 청대 고증학의 성과, 20~21세기에 발굴되는 유물과 문헌들로 볼 때 유가에서 이야기하는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오래된 과거에 대해 저는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물론 완전히 지어내지야 않았겠지만, 전해지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과장이나 윤색, 이상화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관점이지요. (부연하자면, 공자와 원시 유가(또는 선진 유가)의 학자들이 살아간 시기와 요임금, 순임금 등이 살아간 시기 사이에도 꽤 긴 시대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과거가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이해가 개입했을 수도 있겠지요. 특히 주나라에서 천명과 덕치 사상을 주장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점까지 생각하면, 이 16자를 통해 과거에 대한 유가의 이상적인 시각에 대해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이유들이 있기에 왠지 저는 이 16자 구절에 정이 갑니다.
게다가, 이렇게 읽혀지기도 하는군요.
사람이 수학(넓게는 학문)을 해 나가는 것은 (실수와 오류와 비약이 도처에 있으니) 위태롭고, 수학적 올바름을 따라 수학을 해 나가는 것은 (그렇지 않은 다른 길에 비하면) 미미하니, (수학을 해 나아감이) 오직 정밀하고 (하나 하나 타당하게 내용과 생각을 전개하는 것이) 오직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중을 잡게 된다.
제가 아는 여러 사상 중 유가사상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인지, 이렇게 이런 저런 생각해 보기도 하고 의미를 부여해 보기도 합니다. 아직은 "쓰인 글"일 뿐이지 "읽히는 글"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일단은 이렇게 써 봅니다. 언젠가 이 내용으로 다시 좀 더 친화력 있게, 좀 더 의미 있게 글을 쓸 수 있게 되면 좋겠군요.
ps. 도올 김용옥이 중용에 대해서 책도 쓰고 강의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도올은 다른 사람들이 짚어내지 못하는 점을 짚어 내기도 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 모두가 알 법한 것을 모르는 경우도 있는 듯 합니다.(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서 한번 찾아서 살펴볼까 하는 생각은 있지만, 우선순위는 조금 밀리네요. 그렇기에 제가 위에서 중용에 대해 한 이야기는 저 자신이 유가사상 관련해서 이런 저런 읽은 것과 중용 원문을 직접 읽은 것을 토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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